용산에 잠긴 식민지 역사의 비밀
콘크리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곳은 일제강점기 조선군 사령부 2청사가 있던 곳이었다. 이 건물은 1941년부터 42년 태평양전쟁 시기에 미군 폭격에 대비해 지어진 콘크리트 벙커로, 정보실, 작전실, 통신실 등 일본군의 핵심적인 정보작전을 심의하고 작전을 지휘하던 공간이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이곳이 단순한 건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패전 후 관련 자료를 대부분 소각하고 철수하면서 상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역사학자들은 일본군 지휘부가 이 곳에서 조선 청년들의 강제동원 계획이나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할 경우를 대비한 결전 작전까지 논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7사단이 본거지로 사용했으며, 미군정이 철수한 뒤에는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한국전쟁 직전까지 이용했던 공간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후 미8군에 인도되어 정보작전실로 쓰였고, 현재는 소유권이 넘어왔으나 일반인과 연구자 모두 출입이 통제된 채 학계에서도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이 건물만이 아니다. 조선군 사령부 1청사가 설립된 주차장 터 역시 그 내력이 예사롭지 않다. 이곳은 1908년 7월에 들어선 간략화된 서양식 르네상스풍 목조 건물로, 연면적이 넓어 당시 한국 식민통치를 준비하고 수행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자 일본군 기지의 심장이자 두뇌 역할을 했다. 이 사령부 터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 사라진 후 미군은 이곳을 ‘사우스 포스트’라 불렀으나, 현재 어디에도 조선군 사령부를 알려주는 표시나 기념물은 없다. 더욱이 인근의 조선총독 관저 터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용산에서 아방궁이라 불렸던 네오바로크 스타일의 초호화 관저였지만,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1950년대에 철거되었다. 이 터는 2010년대까지 미군병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 정부가 소유권을 이전받았으나, 내부 권역에 대한 발굴이나 지표 조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처럼 용산 지역의 핵심 역사 공간들은 식민통치와 관련된 중요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성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계속 뒷전이었다.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용산공원 조성 과정은 복잡다단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령부 터나 총독 관저 터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조선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 터의 발굴이 우리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실타래를 푸는 선결적 작업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정부 정책들이 공원 조성이나 아파트 건립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깊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조사가 우선시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